오바마 “아버지, 당신의 아픔 이해합니다”
마지막 재회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가 열 살 때 케냐인 아버지와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 오바마가 두 살 때 떠난 아버지가 8년 만에 하와이로 아들을 찾아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짧게 재회했다. 사진 출처 AP통신 |
출세가도 달리다 부족갈등에 휘말려 몰락의 길로
'왜 오바마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그토록 눈물을 흘렸을까.'
1987년 하버드 로스쿨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의 고향'인 아프리카 케냐로 한 달간 뿌리 찾기 여행에 나선 청년 '배리'는 한 초라한 무덤 앞에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그 청년은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이름도 '배리'가 아닌 아프리카식 발음인 '버락'이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출생과 가족에 얽힌 사연들이 계속해서 베일을 벗고 있다.
인종편견이 여전했던 1960년대 초반 18세의 나이로 케냐 출신 흑인 유학생과 결혼한 백인 어머니의 사연(본보 4월 12일자 A19면 참고)에 이어, 오바마 의원이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生父)의 삶과 화해하는 과정도 자세히 드러나고 있다.
케냐 언론인 데일리네이션은 10일 오바마 의원의 아버지인 버락 오바마 시니어의 삶을 자세히 조명했다. 오바마 의원의 자서전 '아버지의 꿈으로부터'에도 아버지에 대한 설명들이 나온다.
이를 종합하면 오바마 의원은 소년시절 미국을 방문한 아버지 쪽 배다른 누나 아우마 씨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들을 들었다.
"나와 동생 로이는 '올드 맨'(아프리카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불렀다)이 1959년 하와이로 유학을 가기 전에 태어났단다. 그리고 올드맨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루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백인 아내와 함께였어. 올드맨과 루스는 케냐에서 2명의 자녀를 또 두었지…."
이복 누이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케냐의 석유회사에 다니는 오바마 시니어는 나이로비에 큰 집과 승용차가 있는 특권층이었다. 외부모와 어머니가 심어줬던 아버지에 대한 환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오바마 의원은 나중에 "노란 하늘에 파란 해가 뜬 것 같은 충격이었다", "사람의 말을 하는 짐승에 대해 듣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하와이대 유학시절인 1962년 캔자스 주 출신의 백인 신입생 앤과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한 오바마 시니어는 아들(오바마)이 두 살 때인 1964년 앤과 이혼한 뒤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떠난다.
훗날 소년 오바마가 어머니에게 "왜 아버지가 우리를 떠났느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는 뉴욕의 한 대학과 하버드대 양쪽에 합격했어. 뉴욕의 대학은 가족 모두의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조건이었지만 하버드대는 본인의 학비만 주겠다고 했지. 그는 '어떻게 최고를 거부하겠느냐'며 보스턴 행을 택했어. 그는 항상 자신이 최고임을 입증해야 하는 성격이었지."
게다가 오바마의 외가 쪽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받아들였지만 케냐의 친가 쪽에선 여전히 용납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첫 결혼이 깨끗이 정리되지 않은 것도 원인이었다. 오바마 시니어는 앤에게 "미국에 오기 전 이혼했다"고 설명했지만, 부족 내 결혼이어서 이혼서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친 오바마 시니어가 고국으로 귀국했을 때 그는 신생 독립국 케냐에서 그야말로 촉망받는 엘리트였다. 고위직에 친구들도 많았다. 석유회사를 그만두고 정부에 합류해 관광부에서 일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의 출신 부족과 오바마 시니어의 출신 부족 간에 갈등이 심해지면서 대통령에게 밉보인 그는 정부에서 쫓겨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취직자리를 전전하다 상하수도 관련 하급직을 겨우 맡았다. 친구들도 그를 '불가촉민' 취급했다.
절망 속에 술에 빠져들었고 가족들에게도 화를 잘 냈다. 그러다 교통사고를 내 1년 반 동안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퇴원 후 나이로비 슬럼가로 이사한 그는 1982년 또 다른 교통사고로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들 오바마를 찾은 건 첫 교통사고 퇴원 후, 아들이 10살 때 크리스마스를 맞아 한 달간 하와이를 방문한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용납할 수 없었던 오바마 군은 1987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를 여행한다. 케냐의 아버지 고향을 방문한 오바마 군은 친척들로부터 '아버지의 청년시절', 그리고 그가 미국에서 돌아온 뒤 겪은 좌절과 곤두박질친 삶에 대해 듣게 된다.
염소 가죽을 옷으로 걸치고 살았던 케냐의 원시부족에 영국군의 진주로 변화가 몰아쳤다. 새로운 문물을 적극 수용한 오바마의 할아버지는 아들을 미션스쿨에 보냈다. 아들은 성적은 우수했지만 독립운동에 관여했고, 기숙사에 여자친구를 불러들이곤 했다.
반항아적 기절이 많아 때론 피투성이가 될 만큼 매를 맞고 집에서 내쳐지곤 했다. 독립운동 관여로 체포됐지만 아버지는 보석금을 내길 거부했다.
20살에 석방된 오바마 시니어는 1남1녀를 둔 가장으로 나이로비에서 하급직 일을 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세계에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우연히 만난 미국인 교육가의 추천서를 받아 미국 대학들에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다.
1987년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한 미국인 손자에게 친할머니는 아들이 젊은 시절 미국 대학에 보내기 위해 쓴 편지 초고 30여 장을 건네줬다.
훗날 오바마 의원은 그 순간을 이렇게 술회한다.
"아버지의 편지들은 '유리병에 넣어 띄워 보낸 쪽지'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미국행 배에 오른 순간 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름 그대로 '신의 축복'을 느끼지 않을까."
'버락'은 '신의 축복'이란 뜻이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꿈과 도전, 그리고 좌절'을 생각하며 청년 오바마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뜨거운 눈물로 아버지와 화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