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전동(基田洞) 큰터 외룡리의 삽짝모랭이에서 내리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는 마을이다. 일명 '대기동(大基洞)' 또는 '큰터마을'이라고 한다.
큰터와 지동(池洞)사이에 넓게 펼쳐진 들이 있는 마을로 그 위치는 내리의 중간이 되므로 '중평'이라 한다. 중평과 지동 사이의 논, 밭을 '중들(中野)'이라 하는데 그위치는 내리분교와 마을회관이 있는 곳이다.
지동의 버스 종점 위쪽인 바른골 어귀로 옛날 절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 마을 안산(案山)인 용바우골의 지세(地勢)와 마을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곡의 경사가 너무 심하여 풍수학적으로 지동 마을에 해(害)를 끼치고 위협하는 형상이므로 그 기(氣)를 누르기 위해 돌로 조산(造山)을 만들어 마을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이곳 돌탑 꼭대기에는 오리처럼 생긴 돌을 세워 놓았는데 새의 머리가 용바우골을 향하고 있으므로 일명 '돌솟대'라고 부르고 있는데 우리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의 일종이다. 그 건너편에는 내리서낭당과 당숲이 있다.
중들 밑에 있으며, 그 지형이 디딜방아의 살개처럼 생겼으므로 '살개골'이라 부르는데 삼도봉으로 가는 작은 살개골과 미사리로 넘어가는 큰 살개골이 있다. 일설에는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골→살개골' 또는 '향곡(香谷)'이라 부른다는 얘기도 있다.
용바우골 동쪽으로 대추나무가 많고, 폭포가 있는 골짜기이다. 여기에서 강원, 경북, 충청도의 3도가 접하는 삼도봉으로 갈 수 있다. 근처에는 풀이 무성하여 나무로 담장을 만들고 소를 방목하는 사람들이 있다. 옛날 소머리를 제물로 바치고 산신제를 지냈던 산신당이 계곡 우측에 있었으므로 '우당골'이라 하였다.
바른골을 지나 동북쪽으로 길게 뚫린 골짜기이다. 녹전리와의 경계인 목우산을 지나 응고개로 질러가는 지름길이 있었다. 지동마을 뒤쪽으로 난 골짜기이므로 '뒷골'이라 한다.
소야치에서 상동읍(上東邑) 내덕리(內德里)의 밤산골로 넘어가는 산자락에 있었던 절터이다. 옛날 이곳에 큰 절을 지으려고 대목수가 대패질을 하는데 여러 마리의 까치가 울어대면서 대패밥을 입에 물고 회암(回岩)으로 날아갔다. 회암이 좋은 절터인가 생각되어 그곳에다 다시 공사를 하는데 이번에도 또 대패밥을 물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스님이(의상대사) 이 까치를 따라가보니 지금의 부석사(浮石寺) 절터에다 대패밥을 수북하게 쌓아 놓았던 것이다. 스님은 이곳이 명당임을 믿고 부석사를 지었으며 지금도 내리 사람들은 부석사가 세 번째 만에 지어진 사찰이므로 『3부석』이라는 얘기를 한다. 그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부석사를 짓는 중 큰 너럭 바위가 있어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 너럭 바위들이 저절로 공중으로 떠 하나는 내리의 회암(回岩)으로 날아오고 나머지 하나는 그 뒷산으로 옮겨졌다는 전설이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내리에서는 경북 영풍군(榮豊郡) 부석장(浮石場)까지 걸어 다녔으며, 내리분교 학생들은 회암의 곱돌재를 넘어 부석사(浮石寺)까지 도보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대야치와 조제 사이에 있었다. 태백, 영주, 풍기, 봉화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가벼운 느릎나무로 만든 지게에다 소금이나 절인 생선을 지고 다니면서 곡식과 바꾸어 가던 선질꾼이나 행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목로주점과 같은 작은 행려원(行旅院)이 있었던 곳이다.
원골과 가리지기 사이에 있다. 옛날 큰 부자가 이곳에 살았는데 주변의 농토가 모두 이 사람의 소유였다고 한다. 가을 추수철이 되면 곡식가리를 쌓아 놓고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잔치를 벌일 줄도 아는 인심이 후한 부자가 있었던 곳이므로 '장자터'라 부른다. 이곳에 큰 묘가 있는데 지금도 그 근처 밭에서는 사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원골 밑에 있는 마을로 여섯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장자터와 원골쪽으로 갈라지는 큰길 밑에 있는 마을이므로 '가라지기→가리지기'로 변하였다.
원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리 마을회관에서 이곳까지는 10km가 되는데 임씨(林氏)들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자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다. 지명(地名)의 유래는 임씨(林氏)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므로 수풀(林)이 우거졌다는 뜻이 되고, 수풀이 있으면 새(鳥)가 있어야 하므로 마을 이름을 '조제'라 하였다.
조제(鳥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작은 암자가 있었다. 지금도 절터에서는 기와장이 발굴되고 있다.
조조에서 경북 봉화로 넘어가는 박달제 밑에 있는 마을이다. 목질(木質)이 단단하여 수레바퀴, 빗, 다듬이, 방망이를 만드는데 이용되는 박달나무가 많은 골짜기이다.
지동(池洞)의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이곳에는 큰 명당이 있었다 한다. 의상(義相)대사가 676년에 문무왕(文武王)의 명을 받고 절터를 찾으러 다니다가 이곳에다 절을 지으려고 했는데, 까치가 대패밥을 물고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北枝里)로 날아갔으므로 그곳에다 부석사를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할 명당에 큰 너럭바위가 있어 고민하던 중, 이 바위가 저절로 공중에서 떠서 옮겨간 뒤 그 곳에다 절을 건립하고 이름을 부석사라 하였다. 이때 큰 바위 하나가 이곳으로 날아왔기 때문에 마을의 지명을 '회암(回岩)'이라고 부르고 바위를 '구들바우'라 하고 바위가 넘어온 고개를 '회암령(回岩嶺)'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소야치(작은모랭이) 남쪽에 있는 소(沼)이다. 장마 때 큰 돌이 굴러내려 부딪치는 소리가 딸각딸각거린다고 해서 '딸각소'라 한다. 일설에는 이곳에 '초병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나이 많은 스님이 표주박을 매달아 놓고 소(沼)의 물을 퍼먹었는데 그 때 표주박이 벼랑에 부딪히는 소리가 딸깍딸깍하여 '딸깍소'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벌때(峰垈) 남쪽에 있으며, 마을 앞에 있는 용소(龍沼)에서 일곱 마리의 용이 승천(昇天)하였으므로 '칠룡동'이라고 한다. 한때 3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칠룡골에는 송이와 함께 산속 깊은 곳 벼랑 위에서 자라는 엽상체식물인 석이(石耳)가 많이 나는 곳으로 석이는 한방재나 음식의 모양을 내는 고명으로 사용된다. 칠용동 남쪽은 경북 부석면과 경계가 되는 선달산(先達山, ,236.0m)이 있다.
칠룡동에 있는 폭포와 소이다. 옛날에는 물이 깊어서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모자랐다는 얘기와,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입구는 좁고 안쪽이 넓은 골짜기이다. 조선 말기 나라가 어지러울 때 어떤 현인(賢人)이 가족을 이끌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인 이곳에 와서 은둔(隱遁)생활을 하였던 곳이므로 '은곡'이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산나물을 뜯으러 갔던 새댁이 이곳에서 애기를 낳았으므로 '응아골'이라고 한다는 얘기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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