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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임진왜란때 친일파

히말라야돌소금 최가소금 2009. 10. 28. 17:17

원글 : http://cafe.daum.net/hyunw49/BymC/393?docid=1EFAG|BymC|393|20090309135022&q=%C0%D3%C1%F8%BF%D6%B6%F5%20%C4%A3%C0%CF%C6%C4&srchid=CCB1EFAG|BymC|393|20090309135022

 

 

 

임진왜란 친일파



임진왜란 생각하면, 의병이 단연히 생각할 것이다.
의병이 무엇인가? 바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운 조선 백성들의 자의적인 부대다. 당연히 반일 정서를 가진 부류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고경명, 정문부, 이정암, 조헌등이 대표적인 의병장으로써 이들은 조선이 임진왜란을 이겨내는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조상들이 있지만, 이에 못지않게 부끄러운 조상들이 있다는 것을.
이 땅에 일본군이 들어온 이래 대다수의 조선인이 저항을 했지만, 일부 조선인들은 일본군에 협력을 하면 반민행위를 했다.


[연려실기술] [조선왕조실록][쇄미록][난중일기] 이외에도 각종 자료에 이런 부역자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어 우리 후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럼, 반민행위를 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볼까?



국경인이라는 인물을 아는가?
그는 임진왜란 시기에 임해군과 순화군 일행을 붙잡아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인물이다.


오늘날의 매국노의 대명사는 이완용이다.그럼 조선 후기의 매국노의 대명사는 누굴일까? 바로 이 사람 국경인이다.조선 후기 내내 매국노의 대명사로 불려졌던 국경인은 과연 무슨 일을 저질러서이런 치욕의 대상이 되었는가?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포악한 임해군은 자기 가족들과 함께 함경도로 피신한다.피신하면서 조정에서는 그에게 함경도에서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에 대항하게 하는 임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조선 제 1의 왕자라는 인물은 그런 임무에 충실히 하지 않았고, 못 된 짓만 저질러 함경도민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그 결과 함경도는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한 체,일본군에게 많은 고을들이 쉽게 넘어갔다. 회령까지 도망친 임해군은 이 곳까지 일본군이 들어오자, 동생 순화군과 같이 두만강변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뒷치다리꺼리를 하던 아전 국경인이 숙부 국세필하고 반란을 일으켜 그들을 붙잡아 가토군에게 넘겨주고 투항한다.


그 시점으로 인해 중앙으로 파견된 관리들의 등쌀에 고생하던 아전 국경인은 그 공으로가토한테 북병사라는 직함을 받는다. 숙부 국세필과 무뢰배들도 하나같이 일본한테 벼슬을 받아 함경도의 주민들한테 온갖 행패를 부렸다.


그 후에 일본군에 무뢰배까지 시달리던 함경도 민초들은 정문부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을 하였다.



특히 국경인같은 이들의 반민행위에 격분한 정문부는 의병을 조직하자 마자 일본군부터 공격하지 않고, 이 친일파 제거부터 확실히 했다고 한다. 국경인은 저항도 못하고 자살을 했고, 국세필은 민중들에게 피살당해 반란은 쉽게 진압된다.


그러나, 조선왕자들을 붙잡아 일본에 넘긴 국경인 일당의 행위는 후에 조선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많은 지장을 준다. 불리한 전세에도 일본은 두 명의 포로 인질 조선왕자를 협상의 패로 이용하여 강화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임해군에게 이산가족의 아픈 한을 남겼고, 그의 대권도전에도 커다란 흠이 되고 만다. (* 임해군의 딸과 아들은 풀려나지 못하고 일본으로 끌려간다. 그중 아들은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승려가 되어 이국땅에서 일생을 마친다.)


전쟁기간에 천민, 상민, 중인계급층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에 투항하고 반민행위를 했지만, 전직 관료출신 또한 일본군에 투항한 인물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성세응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다.


前공조참의를 지낸 사람으로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나서 행한 선무공작에 포섭된 인물이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나서 장기간에 걸쳐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 각종 선무공작을 펼쳤다.



그 결과 ( 한양쪽에서는) 도성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고, 도성은 다시 시장을 형성하면 전쟁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일본군에 빌붙어 각종 부역행위를 했고, 일본군은 통행증을 발행하여 조선인들을 통제했다고 한다.



전현직 관리들까지 선무공작을 펼쳐 이들을 내세워 일본은 지배력을 구축할려고 했지만, 오직 성세응이라는 사람만 포섭될 뿐, 아무도 응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1992년 임란 반발 400주년을 기념하여 모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는데,
어느 한 장면이 아직도 내 머리속에 생생이 남았다.


[ 일반 양반들이 거주하는 집의 안마당이다. 그 곳에서 성세응이라는 인물은 하늘을 쳐다보았고, 그의 부인은 마루에서 일본군이 준 비단과 각종 사치품에 눈에 확 돌아가 이것 저거 만져보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그들 부부의 딸이 일본 여자 두명에 의해서 일본군 총대장 우끼타가 거주하는 방에 끌려들어간다.]


이 사람의 그 후의 행적은 더 이상 나온다. 하지만, 전직 관료출신중에 한명만이 이렇게 일본군에 항복했다는 사실이 왠지.......


1592년 10월경에 철원에 주둔하는 일본군은 조선군이 한양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을 파악했다. 조정으로부터 서울탈환의 임무를 받은 심대가 경기도 삭녕지방에서 관군을 재편성하고 군량미를 모집하고 간자를 동원하여 정보도 수집하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그들에게 포섭된 조선인을 간첩으로 내세워 삭녕지방으로 보낸다.
그 조선인은 경기 관찰사 심대의 휘하에 들어갔다. 심대는 그가 자진하여 선봉에 서서 싸우겠다는 말에 그를 자기 휘하의 장수로 두고 일을 맡겼다. 반역자 조선인은 그 곳에서 조선군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곧 철원의 일본군에게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러자, 조선군의 방어력이 형편없다는 판단을 내린 일본군은 병력을 삭녕지방으로 보내어 아군의 진지를 기습공격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크게 패전을 하여 경기도 관찰사 심대는 전사하고, 그 휘하의 병력들은 죽거나 흩어지는 괴멸의 상태가 되었다. (* 이 반역자의 이름을 잘 모르겠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없어서 그저 반역자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이 외에도 의병장 권응수에게 처단된 일본군 앞잡이 희손일당, 고니시에게 포섭되어 의주와 평양으로 왔다갔다 왕래하면 유언비어를 퍼트려 민심을 소란하게 만들었던 보부상들,정유년의 황석산성 전투에 일본군에 투항하여 성이 함락되게 공(?)을 세운 김해사람20명들이 있었다.

여기에서 설명되지 않은 수많은 부역자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그럼 이들 반역자들이 과연 일본군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을까?


첫째, 길잡이 역할이다.


아무리 대마도인에 의해서 조선의 정보를 수집한 일본군이지만, 상세한 조선의 지리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일본군은 부역자들을 향도로 삼아 길눈이 어두운 상황을 타파했을 것이다.일본군을 이끌고 관아와 성을 안내하는 조선인들을 생각해보니 기분이 쓸쓸할 뿐이다.


둘째, 각종 정보제공.


도성의 점령이 장기간 되자, 일본군의 선무공작도 어느 정도 한계를 내보이기 시작했다.점차 일본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조선인의 반일 움직임에 조선인 스스로가 일본군에 알려 동족들이 적군의 손에 죽게 만든 일이 비일비재했다.

특히 이긍익이 작성한 연려실기원에서는 도성안에서 무뢰배의 밀고로 인해서(일본군들이) 많은 조선인들을 종로앞이나 남대문 밖에서 대거 불태워 죽이고 극히 참혹한 짓으로 시위하여 위엄을 보인 결과 해골이 산더미를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밀고외에도 조선군의 이동과 위치를 알려주거나, 조선인 납치, 약탈에도 한몫했다.또한 조선군의 장단점을 일본군에게 알려 적군에게 유리한 고지를 형성하게 해주었다.


셋째, 전투참가다.


사천해전에서 일본군 선단에서 조총을 쏘는 소총수중에 조선인도 있었다.
동포들에게 조총을 쏘아대는 조선인의 모습에 이순신은 분개했다고 전한다.


부역자들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의해서 강제로 일본 수군의 노꾼이되었고, 부산포 해전당시에는 조선군 포로들이 일본군에 의해서 강제로 화포들을 조선수군선단에 향해 발사시켜 조선수군의 몇 명이 전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군에 비해 궁시술이 현저하게 떨어진 상황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투항하여 이러한 약점들이 보완했다고 한다. 행주싸움 당시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편에 서서 궁시를 발사하여 다수의 조선군이 희생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관군과의 전투를 직접 참가하여 조선군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럼 과연 일본군을 위해서 부역의 일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 전에 사대부들에게 차별대우를 받았던 많은 이들은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에 처하자, 세상이 바뀌었다는 인식아래에 그동안 받은 설움을 갚기 위해서 일본군에 붙은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국경인과 국세필의 반란이 그 예로 들겠다.
아니면, 먹고 살기 위해서 부역의 일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조선인은 자기 딸을 왜장한테 받친 경우도 있고,( 먹기 위해서)일본군 복장으로 변장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민간에 들어가 살인과 약탈을 행한 일도 있었다.



또한 난중일기를 보면 (먹고 살기 위해서) 어느 사대부가 적에게 부락의 위치등을 알려줘 그 결과 많은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그 보복으로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통틀어 이런 부역자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정확한 파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광범위하게 퍼졌다고 생각이 든다

.
고니시군이 평양에서 조선군에 크게 패한 것을 분히 여긴 나머지, 그 보복으로 일본군은 1593년 1월 24일에 대규모로 도성안의 남자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그것에 대해서 [쇄미록]은 이렇게 전한다.



[거리 곳곳 가가문정(家家門庭)에 시신이 쌓여 있는 것을 처참하여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하니 이는 필시 정월 24일 분탕(焚蕩)할 때 피살된 사람들이다.



이들 죽어간 사람은 처음에 도성을 나가지 않고 왜적에게 잘 보여 이득을 추구하며 인가에 매치(埋置)된 물건을 모두 파서 훔쳐다가 자기 집에 쌓아두고 주식(酒食)을 배불리하고 스스로 잘살아 보려는 계책을 세웠으며 뒷날에 근심을 생각하지 않다가 필경 모두 도살(屠殺)당한 것이니 이것은 모두 스스로 취한 것이라 누구를 허물하고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이 기록을 보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反民행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일본군이 서울에서 남해안으로 내려갈 때, 조선인 1000-2000명이 따라 갔다고 한다.


또한 서울을 탈환하고 , 조정이 다시 들어와서 倭에 빌붙어 나쁜 짓을 일삼은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내렸을 때에도 워낙 많은 사람들이 광범위하여 모두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극한 짓을 한 사람들만 처벌했다고 한다.[이이화의 조일전쟁]


난중일기에도 1593년 가을에 왜성을 바라본 이순신 장군이 적의 무리중에 1/3이 조선인이라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는 내용이 있다.


단편적인 기록으로도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반민행위를 했는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빌붙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를 알아보았다.



일제시대만 친일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에도
조선인들이 친일행동을 했다니 놀라운 사실이다.




(* 조선이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런 무뢰배들의 정치세력화는 안되어 근대의
식민지의 친일파 청산하고는 비교하는 것이 좀 무리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단순한 진리에 다시 한번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경고를 제대로 보지 않은채, 친일파 청산이라는 역사적인 일을 회피하고 있다. 반란을 일으킨 놈들을 처벌하는 것이 일본한테 다시 당하지 않을려는 준비의 첫번째 단계다.




모 신문과 모 국회의원들이 하는 말 “지나간 과거를 들춰내서 뭐 어쩌겠는가!”이 일반인의 대중적인 생각으로 각인되면 다시 한번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겠는가!